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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듣고 보았나/책/사진

[사랑의 단상 - 롤랑바르트] atopos?


내가 거의 10년째 늘 아이디로 사용하는 아토포스-atopos..

이 엄청난 단어는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나오는 담론 중 하나이다. 그 담론을 내가 어찌 summary 할 수 있겠는가~~
그대로 옮겨본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아토포스'(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부여한 명칭)로 인지한다. 이 말은 예측할 수 없는, 끊임없는 독창성으로 인해 분류될 수 없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의 아토피아는 에로스의 시끈가오리에 관계된다.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매혹시키는 그 사람은 아토포스이다. 나는 그를 분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내 욕망의 특이함에 기적적으로 부응하려 온 '유일한', 독특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상투적인 것(타인들의 진실)에도 포함 될 수 없는 내 진실의 형상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 삶을 통해 여러 번 사랑했고 또 사랑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 욕망이 아무리 특이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떤 전형에 속해 있단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어떤 공통점이 있어 - 비록 그것이 아주 미세한 것이라 할지라도(코,피부,표정 등)- 그것이 나로 하여금 "저 사람이 내가 원하는 타입이야, 바로 내 타입이야" 또는 "전혀 내 타입이 아닌걸" 이라고 말하는 걸까.? 바람둥이의 구호: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타입"을 찾아 일생을 헤매는, 조금은 힘든 바람둥이가 아닐는지.? 나는 상대방 육체의 어느 구석에서 내 진실을 읽어야만 할까.?
 
 나는 그 사람의 아토피아를 그 얼굴에서 포착한다. 그의 순진함을, 그의 위대한 순진함을 읽을 때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내게 저지른 아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순진한 사람은 분류될 수 없는 게 아닌지.? ('잘못'을 분류할 수 있는 곳에서만 제 기능을 발휘하는 사회에서는 그러므로 항상 수상쩍은 존재인) X는 성격상의 여러 특징을 갖고있어 그를 분류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그는 '신중하지 않았고, 교활했고, 게을렀고.' 등등) 그러나 나는 그의 눈에서 두서너번 어떤 순.진.함.의 표현을 읽을 수 있었고, (달리는 말할 수 없는)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나든간에 그를 그 자신과는 별도로, 그의 성격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간주하기를 고집했다. 그때 나는 그를 모든 종류의 평가에서 제외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순진함과 마찬가지로 아토피아 역시 묘사나 정의, '이름(잘못)'의 분류이자 '마야 maya'인 언어에 저항한다. 분류될수 없는 그 사람은 언어를 흔들리게 한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람에 대해 그 사람에 관해 말할 수 없다. 모든 속사는 거짓이며 고통스럽고, 잘못된 것이며,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그 사람은 무어라 특정지을 수 없다.(아마도 이것이 아토포스의 진짜 의미일지 모른다.)
 
 그 사람의 빛나는 독창성 앞에 나는 자신을 아토포스.라고 느끼기는 커녕 오히려 분류되었다고 생각한다.(친숙한 서류마냥) 그렇지만 때로 이 고르지 못한 이미지들의 유희를 정지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왜 나는 그 사람만큼 독창적 이지도 강하지도 못할까.!") 그리하며 독창성의 진짜 처소는 그 사람도 나 자신도 아닌, 바로 우리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쟁취해야 하는 것은 독창적인 관계이다. 대부분의 상처는 상투적인 곳에서 온다. 모든 사람들처럼 사랑해야 하고, 질투해야 하고, 버림받아야 하고, 또 욕구불만을 느껴야 하는 등등... 그러나 독창적인 관계일 때에는 상투적인 것은 모두 흔들리며, 초월되고, 철수한다. 그리하여 이를테면 질투 같은 것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머무를 처소도 토.포.스.도 어떤 '결론'이나 담론도 부재하는 이 관계에서는.